[기획1-농업의 검은 역사 시장개방] 세계 무역질서 변화와 우루과이라운드
[기획1-농업의 검은 역사 시장개방] 세계 무역질서 변화와 우루과이라운드
  • 박영남 기자
  • 승인 2018.09.11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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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에서 홀로 시금치를 수확하고 있는 고령농. 우리나라 농업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홀로 시금치를 수확하고 있는 고령농. 우리나라 농업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내 농업은 대내외의 환경 악화로 인해 점차 축소되고 있다. 농민의 숫자는 크게 줄었으며 소득 또한 도시민이 받는 봉급의 60%에 지나지 않는다. 농민 소득 하락은 사람없는 농촌을 만들고 농업의 인력부족을 야기시키며 이는 다시 농업을 축소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시장개방이다. 세계의 무역장벽이 허물어지고 지구촌 반대편에서 생산되는 상품이 수 십일이면 내 집앞에 배달되는 글로벌 시대 이면에는 국내 농업의 피해가 자리하고 있다. 농업 부국이 수출하는 각종 농축산물은 국내 식탁을 점령하기 위해 점차 몸집을 불리고 있으며 앞으로 10년 후에는 FTA로 인한 관세제로의 시대가 도래한다. 본지는 그동안 국내 농업에 영향을 끼친 세계 무역질서의 흐름을 쫓아 우리농업의 현실을 진단해본다.


GATT 체제 종식과 다자간 무역의 신호탄

1960년대 세계 무역질서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인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에 의해 발전해 왔다. 강력한 법적 구속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GATT를 중심으로 한 수차례 협상(Round)들은 세계 경제성장에 공헌 해왔다. 세계 무역시장에 있어 상당한 관세가 관철된 1960년대 케네디라운드, 관세 인하뿐만 아니라 비관세장벽의 완화와 철폐까지 논의됐던 1970년대 동경라운드는 전 세계 무역장벽이 조만간 허물어지고 경제권역이 하나가 되는 탈 국가 무역시대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과 우려가 공존하는 시기였다.

1980년대 들어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세계무역질서는 보호주의가 팽배해 지면서 유럽공동체(EC)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지역주의식 협력과 협정이 활개를 쳤다. 이는 1960~1970년대와 달리 1980년대에 일본, 서독, 아시아 신흥국들의 경제력이 급부상하고 미국과 유럽대륙 등 무역 주도국들의 경제적인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생긴 반작용이었다.

특히 1970년대 식량위기, 곡물파동 등을 겪으며 각국이 식량안보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보조금 등을 통한 자국 농업 보호 정책을 폈으며 자급률을 늘리려는 시도 또한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에 세계 농산물 시장은 공급과잉에 시달렸으며 개방과 농업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됐다. 이 시기 소련의 붕괴, 공산권의 와해와 맞물리면서 미국과 소련 중심의 정치논리가 판을 치던 무역시대를 마감하고 경제논리가 우위에 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미국이 관장했던 무역질서가 힘을 잃자 각국의 통상마찰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무역규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세계적인 농업개혁을 목표로 한 다자간 협상의 필요성이 힘을 얻게 된다. 40년간 무역을 주도해 왔던 GATT체제는 종식을 고하고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계기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바통을 넘겨주면서 전 세계 무역시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한다.


세계 무역질서를 관장하는 WTO  

수출주도형 성장을 계속해 왔던 우리나라는 수출 측면에서만 보면 WTO체제의 수혜자다. 우리나라는 기존 GATT 체제에서 선진국의 자의적인 무역제한과 보복조치로 인해 수출증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WTO체제는 국제교육 규범을 지킬 수 있도록 분쟁해결기구를 신설하고 모든 분쟁은 반드시 분쟁해결기구를 통하도록 규정했다.

미국은 슈퍼301조 등과 같은 무역보복조치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분쟁은 WTO가 출범하면서 GATT 보다는 객관적인 해결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어느 회원국도 자국의 이익이 침해됐다는 판단에 따라 일방적인 보복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WTO는 그동안 GATT가 행사했던 상품위주의 무역을 더 강화하는 동시에 서비스와 지적재산권, 무역 관련 투자 등과 같은 새로운 교역문제까지 포괄했다. 그리고 세계 무역 분쟁조정 뿐만 아니라 관세인하 요구, 반덤핑 규제, 보조금, 기술 장벽 등 준사법적 권한과 구속력을 행사하면서 국경 없는 무한경쟁시대의 포문을 열게 된다.

 

국내 농업의 검은 그림자 UR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는 WTO체제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UR협상의 핵심은 그동안 수면 아래서 제한적으로 논의됐던 농산물 시장개방이었다. 사실 이면에는 미국과 유럽공동체(EC)의 재정상황과 곡물 메이저들의 로비가 숨어 있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이 과잉되고 가격이 폭락하자 농업 선진국들이 과도한 보조금을 남발하면서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게다가 수출 보조금까지 추가 투입하면서 재정상황이 더 악화됐다. 미국과 EC는 수입국가의 관세철폐로 인한 이득에 주판알을 튕겼고 여기에 카길 등 곡물 메이저까지 UR협상을 부채질 하면서 협상분위기는 무르익는다. 1986년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 각료선언이 채택되면서 우루과이라운드가 개시된다.

우루과이라운드가 개시될 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1990년 브뤼셀에서 각 나라 각료들이 모여 타결을 시도할 때도 우리 정부는 ‘UR은 타결이 불가능한 협상’으로 치부하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도 않았고 국민들도 김영삼 대통령이 ‘쌀시장은 절대 문고리를 열지 않겠다’고 단언한 탓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협상 초기에는 우리의 예상대로 지지부진한 협상이 계속됐다. UR 협상 테이블에 서비스, 금융 시장까지 얹어지면서 각 국의 이해관계는 더 치열해지고 복잡해졌다. UR 협상의 새로운 진전은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부터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가 연내 타결을 목표로 신속처리권한(FTA)의 연장안을 미국 의회에 제출하면서 UR협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993년 7월 동경에서 개최된 서방선진 7개국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미국, EC, 일본, 캐나다 등 4개국 간의 ‘공산품분야 포괄 관세 인하 합의’ 도출에 힘입어 협상 타결의 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 GATT 사무국의 집행부가 피터 서덜랜드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급박하고 빈번한 협상을 주도, 결국 1993년 12월 15일 협상이 타결됐다. 이는 농산물에 대한 수입쿼터 폐지, 관세감축 등 수출입에 대한 장벽을 허무는 것뿐만 아니라 농업 보조금, 농산물 수출보조금 제한 등 농업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셈이 됐다. 특히 우리나라는 쌀 시장 개방에만 매몰돼 협상 운신의 폭이 크게 축소됐고 다른 분야의 개방 폭을 넓혔다. 당시 제대로 된 통상전문가가 부족한 탓에 국가 차원의 통상 기구를 설립해야 된다는 목소리까지 높아지게 됐다.


규모화 집약화 농업의 시작

UR 협상은 우리나라 농업지형을 크게 바꾼 계기가 됐다. 쌀을 관세품목에서 제외시키기는 했지만 최소시장접근물량은 허용했으며 낙농을 제외한 축산부문은 18~44%의 관세만을 남겨두고 전면 개방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62조원의 대규모 농업 지원정책을 약속하면서 영세농 위주였던 우리농업을 전업화·규모화로 체질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으며 20년이 지난 지금 규모화에 있어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축산부문은 규모화에 성공을 거두며 수입 축산물과 어깨를 견주며 경쟁하고 있다.

다만 정부의 개방화와 맞물린 경쟁력 강화 정책은 농민이 빚을 내 시설을 현대화하는 등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를 만들면서 오히려 농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이는 등 영세농들의 급격한 구조조정을 불러왔고 우리나라 전체 농민 인구는 절반 이상 쪼그라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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